<전시리뷰>
그 섬엔 우리가 없다.
글. 임랑(소설가, 문화기획 ptrevo@naver.com)
거기 섬이 있다.
회색조의 바위섬은 비좁다. 왼편에는 거대한 꽃다발이 자라고 부처님의 수인법을 한 손이 불쑥 솟아있다. 그 뒤로는 차주전자에서 폭포가 쏟아져 나온다. 하늘은 칠각형으로 조각난 채 섬에 끌려 다닌다. 마치 배의 돛처럼. 반인반수의 여성들–보통 신화에서 반인반수는 사람 얼굴에 몸체가 동물이다. 여기에서는 역전되어 있다 –은 의식이라도 치루는 듯 춤을 추고 있다. 파랑개비, 포크레인, 종이학과 비행기는 아이가 갖고 놀던 장난감을 슬쩍 당겨온 것 같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뭉게구름으로 감싸여 여백을 적절히 조정하고 있다. <The island 세상에 없는 섬>
물 속 섬도 구성은 비슷하다. 화려한 빛깔의 열대어와 고래, 해파리와 게가 등장하여 이 곳이 물 아래 세상이란 점을 환기시켜주지만 곧바로 바위틈에 핀 백합과의 꽃과 사슴이 단순한 물 속 세상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여지없이 이 그림에도 어떤 손이 등장하고 있으며 주방기구와 가위 그리고 영유아의 손근육을 발달시켜주는 장난감이 놓여있다. 마치 테마파크의 롤러코스터를 축소한 느낌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물들이 놓인 곳의 지반을 훑어보는 순간 거대한 두상 조각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underwater island–아무도>
이지원의 두 작품 <The island 세상에 없는 섬>, <underwater island–아무도>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대표작에서 몇 가지 지점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섬은 인공물과 자연물의 누적으로 비좁다. 즉 뭔가 초과과잉의 상태이다. 둘째, 사물들이 자연스럽지 않으며 서로 간에 어떠한 개연성도 갖고 있지 않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사물들이 한 곳에 ‘집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섬은 우리가 흔히 아그리파라고 하는 두상 조각을 지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에서 머리만 취하여 소묘 연습용으로 만든 아그리파는 인간중심주의의 심볼이다. 그리스 조각은 절대적인 황금비율로 실재에서는 보기 힘든 이상적인 미의 원형이자 인본주의 정신을 대표한다. 이런 의미의 사물이 ‘섬’이라는 하나의 세계로 치환되고 있다. 섬은 이제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과잉의 상태에서도 어떤 질서와 조화가 생겨나게 될까? 그리고 ‘섬’에 집합되어 있는 사물들은 누구에 의해 호출되었으며, 정말 실재하는 것들일까? 라는 궁금증이 인다.
알레고리에서 판타지로
사실 이지원 작가는 전작에서도 위의 대표작과 유사한 기법과 소재를 즐겨 사용해 왔다. 차이라면 근작들이 좀 더 이야기하는 바가 다층적이고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랄까. 예를 들어 <관계의 관계>나 <침묵의 정원> <없는 계절>에서 두상 이미지는 확연히 드러나고 있으며 그 역할도 분명해 보인다. 두상은 화려한 꽃들로 뒤덮여 있거나 반쯤 잘린 면에 꽃들이 꽂혀있는데, 이는 흡사 수반이나 화병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기명절지(器皿折枝)’화를 참조하여 이를 혁신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기명절지’는 한국미술사에서는 19세기 말에 유행하였던 장르다. 문인정신과 와유사상을 표현하는 문인화와 산수화의 틈새에서 ‘사물’이 중점적인 표현 대상이 된 예는 흔하지 않다. 물론 기명절지는 서구의 정물화와는 작가의 시선에서 차이가 상당하다. 서양의 정물화는 빛과 구도, 양감을 실험하고 훈련하기 위한 용도였다면(물론 바니타스라고 하는 우의적인 그림도 있다) 동양의 기명절지화는 사물에 숨은 의미를 즐기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고서, 괴석, 찻주전자, 청동화로, 연꽃 등은 각각 어떤 의미를 지칭하는 기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지향은 명분일 뿐, 자신이 얼마나 그런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유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는 아니었을까? 조선에서 19세기 말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기존의 계층질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신흥 세력이 등장하던 시기다. 이들이 자신들의 빈약한 정신세계를 문화자본으로 보충하고 싶었다면 기명절지도는 적절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말이 좀 길어진 측면이 있는데 나는 이지원 작가가 이런 기명절지의 역설 – 정신을 노래하는 것 같으나 결국 소유를 노래하는 – 에 착안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기명절지를 시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지원의 아그리파 섬 위에서 피어난 모든 것들은 오늘날 현상계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물들, 혹은 언제든 ‘소유할 수 있는’ 사물들이라고 단정해 볼 만하다.
이지원의 작품 속 사물들을 좀 더 촘촘히 살펴보면 이런 추측이 그런대로 설득력을 얻는다. 태평양에서 길어져 온 관상 기능의 ‘열대어’, 카페나 집안을 꾸미기에 적합한 화사한 수입종의 ‘꽃들’, 그 밖에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물들 사이로 ‘유모차’나 ‘젖병’ ‘주걱과 수저’와 같은 생활세계를 반영하는 사물이 은근슬쩍 끼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손’과 ‘발’ ‘두상’과 같은 신체의 일부 이미지들이 있는데, 절단된 신체들 또한 사물과 같은 등급으로 어떤 생명력도 느낄 수 없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기명절지의 ‘알레고리적’ 기법이 이지원의 작품에서도 확장 지속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지원의 작품을 ‘확장된 정물화’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이지원의 사물들은 개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어느 순간 호출되어 집합적으로 모여 있지만 하나가 빠지고 다른 것이 끼어든다 한들 풍경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물들을 도식적이고 라인 드로잉의 형태로 그려낸 것도 이들의 실재성을 최대한 날려버리기 위한 기법이다. 특히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으로 컴퓨터 안에서 전체 화면을 구성한 뒤 작가는 이를 대형 캔버스 위로 옮긴다고 한다. 이런 번거로운 절차 안에서 작가는 숱하게 자연물과 인공물을 교체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리라 예상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섬이라는 가상 세계를 그리는데, 이러한 ‘판타지’적인 설정이 흥미로운 것은 현실 세계의 모순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섬은 현상계를 비추는 알레고리이자 판타지의 세계가 된다. 그 안에서 부유하는 사물들은 판타지를 연출하는 배경이거나 소품이다. 그것이 개연성 없는 소비문화를 말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인류가 지향했던 인본주의는 몰락하고 자연과 인간마저도 사물 또는 이미지로 채집 가능함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와 멀어져 표면적인 것들로 가득 찬 고립된 섬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인지.
그 함축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그 섬은 가득 찼지만 공허하고, 화려하지만 비어있다. 그래서 그 섬엔 우리가 없다.